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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삶에 티끌같은 빛

category 리뷰 2019. 9. 22. 21:19

  오랜만에 친구랑 영화를 보러 갔다. 보고 싶던 영화였는데 8월 말에 볼까~ 하다가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어봤는데 보면 너무 힘들 것 같지 않냐는 말에 그렇지..., 하고 보지 않았었다. 그 당시에는 방학 내내 하던 프로젝트가 막 끝났던 참이라 꽤 지쳐 있어서 그랬다. 프로젝트 하는 동안은 2주 동안 많은 task를 한꺼번에 해내느라 잠도 잘 못 잤었는데 지금은 적어도 그때보다는 잘 잔다! 그래서 친구가 합정에서 점심을 먹는 겸 해서 보자는 말에 그러자고 했다.

 

<벌새> 포스터

 

  보기 전에 우연히 씨네21에서 김혜리 기자님이 <벌새>의 김보라 감독님을 인터뷰한 글의 한 부분을 봤다.

-<벌새>의 오프닝 신은 설명 없이 의미심장하다. 심부름을 갔다가 아래층 아파트로 잘못 돌아온 은희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린다. 마침내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돌아온 은희는 방금 소동을 엄마에게 떠벌릴 만도 한데 아무 말도 없다. 엄마에 대한 소녀의 잠재적 불안과 거리감이 보인다. 그리고 카메라는 다른 ‘은희들’이 살고 있을 법한 아파트 전경으로 줌아웃한다.

=엔딩은 늘 정해져 있었지만 오프닝은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시작해도 진부하더라. 그러던 어느 날 은희처럼 패닉에 빠졌던 경험이 떠올라, 영화에 관심도 없는 오빠 친구에게 무심코 들려줬더니 자기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더라. 군대 휴가를 나와 초인종을 눌렀더니 강아지 짖는 소리가 나서 가족들이 나를 버리고 이사갔을까봐 순간 무서웠다고 한다. 상식적인 반응은 “손님이 왔나?” 정도일 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 보편적 체험임을 알았고 마지막 줌아웃으로 많은 집을 보여줬다. 만약 은희의 마음이 건강했다면 엄마에게 실수담을 털어놓았겠지만, 은희는 아무 일 없던 척한다. 거기에 엄마와 딸 사이의 심연이 있다.

  다 읽은 건 아니고, 이 게시글이 <벌새>에 관한 걸 깨닫자마자 꺼 버려서 '오프닝 신은 설명 없이 의미심장하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그래서 오프닝에 대체 뭐가 나오길래 그러지? 하는 기대감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보면서 내가 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이 설마 나만 빼놓고 어디론가 가 버렸나? 아니면 나에게 무언가 실망했나? 온갖 생각이 다 든다. 그러다 내 실수임을 깨달았을 땐 고양되었던 감정에서 갑자기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데 마음 속 어딘가에는 여전히 불안감의 흔적이 남아 있고.

  (예상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었다. 중학생일 뿐인 은희는 그 맘때 속해 있을 수 있는 모든 집단으로부터 폭력을 경험한다. 학교, 가정, 친구, 연인, 심지어는 연인으로 발전하려던 사이에서도. '학창시절'은 흔히 추억 속에서 예쁘게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은희의 세상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뭇매를 맞았던 것처럼) 은희는 오빠의 심기를 거스를 때마다 '오빠의 화가 풀릴 때까지' 맞고, 아버지는 외도를 한다. 어머니와 언니는 삶에서 빛을 잃어버린 채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 같다.

  이런 은희에게 어느날, 정말 갑자기 영지가 나타난다. 담배도 피고, 찾아와서 갑자기 울면 우롱차를 내어 주고, 어딘가 판타지 같은 사람이다. 은희는 영지를 정말 많이 의지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최고 대학을 다니는 영지는 은희의 말을 잘 들어주고, 때로는 마치 진리 같은 말들을 해 준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으면서도 성인이고, 시덥잖은 어른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 영지와 은희가 대화하거나 함께 있는 씬에서 은희는 은희를 둘러싼 폭력으로부터 유리되어 좀 더 넒은 세상에 있는 것만 같다.

  비극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항상 손을 잡고 온다는 데에 있다. 언니가 버스를 늦게 타서 재난에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때, 영지는 죽고 있었다. 은희는 그 사실을 언니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기뻐한 이후에 알게 되었고, 영화의 결말을 함께하는 영지의 편지는 영지 그 자체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도 아름답다. ... 방학이 끝나면 연락할게. 다음에 만나면, 모든 것을 이야기해줄게....

  영지가 죽은 이후에도 은희의 삶은 이어져야 하고, 어디론가 가고 오고 하는 여정의 연속이다. '모든 것'은 결국 나 아닌 다른 누구도 말해줄 수 없다. 은희의 삶은 누가 봐도 괴롭고, 절망으로 차 있지만 그 안에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의지하는 사람이 생긴다. 이것으로 은희의 불행을 덮을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삶이 계속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너무나 괴롭고 절망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작은 빛 덩어리 같은 일들이 존재한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진리 같은 건 없다.

  분명히 여기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도 나를 마중나오지 않는 불안감 속에서 부유하던 은희는 이제 정면으로 스크린을 바라본다. 삶은 힘들다. 엉망인 삶 속에서 더욱 엉망인 나를 좋아하기는 더욱 힘들다. 그런데도 손가락은 움직인다.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아도, 할 수 있는 게 있다. 절망을 얘기하기는 쉽고 그 다음의 내일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세상 속에서 그럼에도 살아간다. 은희는 지속되는 삶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절망 속에 둘러싸인 채로 혼자서. 그래도 돌아보면, 그때는 어제였다.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삶은 살아지고 늘 새로운 누군가와 반짝이는 관계를 맺고..., 그 때가 되면 은희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겠지.

  이렇게 얘기했지만 1994년에서 불과 몇 년 지난 해에는 IMF가 터지고..., 나는 은희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너무나 걱정돼.... ㅠㅠ 잘 이겨냈을까..., 또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아버지에게 전화가 갔는데 나의 부모가 맞는지를 의심케 하는 반응을 보지는 않았을까.... 그 안에서 은희가 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자기 어머니가 하란 대로만 휩쓸려서 은희를 더욱 더 불행하게 하는 남자친구와는 어떻게 됐을까.... 다른 말이지만 은희가 '나는 너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어'라고 말하고서 집에 와서 엄청 뛰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영지의 편지가 담긴 소포 배달이다.) 이때 나는 아랫집에서 층간소음 때문에 올라온 줄 알았다. 그런데 같이 본 친구도 그랬대서 정말 같은 걸 걱정하고 있었구나 하고 웃음이 나왔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 오빠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그 둘이 갑자기 대체 왜 우는지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장면 자체가 죽은 줄만 알았던 언니가 죽지 않았음에 안도하고 가족들이 어딘가 머쓱하면서도 가라앉은 분위기로 그래 죽지 않았으면 됐다.... 하면서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인데 갑자기 그렇게 울어버리니까...영화에서 어딘가 튕겨나와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친구가 그러라고 만든 씬 아니겠느냐고 했다. 너무 몰입하지 말라고. 인터뷰에서 감독님은 오빠의 전형성을 염려해서 넣은 씬이라고는 하지만, 난 친구의 해석이 더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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